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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목마

逸相

♪음악 링크

 

#일상1

 

"그래서 말임다, 제가 그때-.."

 

진분홍이 말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뭐랄까.. 한마디로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 애가 하는 말은 대개 커다란 사건이 없어도 떠들썩한 분위기였으니까. 딱히 싫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 애의 언어는 따지고 보면 소음이라기보다 도전의 환호, 난해보다는 코앞의 정답. 소음이 아니라면 시끄럽지 않았고, 난해하지 않다면 어지러울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너와의 대화는 내게 있어 여행이다. 도전과 명료함이 가져와줄 최대의 자유. 조금 거창한가 싶기도 하고.. 모르겠다. 싫지만 않으면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겠어?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조금, 아주 조금 뒷목이 시렸지만 괜찮다. 나를 여행으로 이끌어준 햇살이 따뜻하다면 그 온기는 계속 나를 향할 테니. 아, 햇살이 두른 목도리라니. 이거야말로 거창하기 그지없다. 길을 걷는 이 순간이 조금 더 가벼워지는 기분이야. 무려 햇살이 곁에 있다. 지금만큼은 오직 나를 비춰주는 햇살이. 가끔 생각해. 커다란 볕이 바람대로 작은 싹들을 비춘다면, 그건 정말로 예쁜 모습이겠거니 하고. 나는 이러한 이유로 오늘도 시간이 멈추기를. 그러나 직후 다시금 빠르게 흘러가길 바란다.

 

"..? 선배님 추우심까?"

"아니. 너 추울까 봐."

 

시간이 아무리 빠르게 흐른다 한들, 그 예쁜 모습을 볼 수 없다면 나 분명 아이처럼 서럽겠지. 손을 잡자. 나는 바보 같이 울지 않으려 지금의 너를 잡는다. 나는 햇살이 쉬어가는 그늘. 그늘 속의 온기, 지금만큼은 온전한 너의 것.

 

 

#일상2

 

오전과 오후의 사이, 정오의 카페는 제법 붐빈다. 조금 더 지나면 그야말로 바글바글. 조용하고 한적한 이 카페는 복잡한 걸 안 좋아하는 내가 겨우 찾아낸 곳이었다. 여기 샌드위치 제법 맛있거든. 허기를 달래고 놀기 위한 준비로 충분할 것이다. 아쉬워할 네가 눈에 선한데, 그게 조금 웃겨. 서로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주고 싶어서 벌이는 경쟁이라니.. 흔하지는 않잖아. 순서를 정해두지 않았으면 아직까지 네가 사니, 내가 사니 복작거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없이 생각하고 계산을 마치고 보면, 시선을 돌린 곳엔 네가 앉아 있다. 유리창이 벽 하나를 대신한 창가는 그냥 보기에도 여유로워 보여서, 심심한 건지 구경하느라 바쁜 건지 테이블 아래 두 다리 까닥이는 뒷모습. 다가가니 나를 향해 곡선을 그리는 마젠타가 기껍다. 옆자리에 앉으면 그게 조금 더 가까워져. 아, 고양이. 창문을 사이 두고 지나치는 고양이 털, 그게 날렸는지 호흡이 조금 간지럽다. 여긴 바람도 없는데 이상하지.

 

"오셨슴까? 저기 방금 고양이 지나갔지 말임다!"

"어, 봤어. 까만 털. ...귀엽더라."

 

잠깐 정적. 그 잠깐을 못 참고 시작된 대화는 울리는 벨에 얼마 안 가 다시 끊긴다. 좀 얄미운가.. 그래도 어쩌겠는가, 놀려면 먹어야지. 나는 오늘 우리 오후의 전반을 책임져줄 샌드위치를 안전히 모셔올 의무가 있었다.

 

...

 

바 테이블에 가져온 것들을 올리면 너는 눈을 빛낸다. 그래, 뭐든 솔직하게 표현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잘 먹겠슴다~!"

"응. 필요하면 더 시키고."

 

맛있어 보이는 빵과 시원한 음료, 잔에서 얼음이 차릉 기우는 소리. 유리창을 통과한 햇빛이 투명한 얼음을 넘어 테이블에 산란한다. 그것은 따뜻한 색이었다. 따뜻한 소리, 따뜻한 웃음. 유리창은 햇살을 통과시키고는 매서운 겨울바람만 단호히 막아선다. 그리하여 이 겨울은 언제든 따스함으로 변모할 수 있었던 걸까. 혹은, 길을 거닐며 햇살에게 건넨 목도리가 이 행성의 온기를 지켜준 걸까. 이제 막 오후가 된 낮의 태양. 카페 안은 그 빛으로 인해 레몬 색이다. 알아채지 못한 사이 분홍색 스며든 레몬색.

 

 

#일상3

 

밤은 별로 가득하다. 세상을 환히 비추지는 못해도 묵묵히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는 별들. 잠시 저편으로 물러간 해님과 별들의 빛을 받아 잔잔한 달님이 있다. 날이 차다. 달은 해가 쉬어갈 틈을 만들어주는 존재. 낮동안 해가 누군가를 위해, 혹은 그저 그러고 싶어서 밝았다면 밤은 그런 해를 위해 달이 빛나고 싶은 시간.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어.

 

네 웃음이 좋아.

 

밝잖아.

 

...

 

사실 밝지 않아도 좋아. 그저 네가 그 자리에 있다면 나는 언제고 너를 찾아 쉬자고, 쉬었다 나아가자고 손을 내밀 수 있으니까. 그거면 됐어. 그럴 수 있는 일상이 일상逸相이 되는 것 같아서 좋아. 편안할 일, 서로 상... 너에게도 이러한 하루가 일상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밤이 차서 상기된 네 뺨에 춥겠다는 생각보다도 귀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으니 나는 사실 아주 못된 사람인 게 아닐까 싶어. 그래도 봐주라. 나 내 겉옷 지금 너한테 다 줬다? 그런데도 네 손이 내 손보다 차다는 게 좋아. 겨울에는 내가 네게 온기를 전할 수 있어. 여름에는 네가 내게 그늘을 전해주겠지. 그냥... 그런 하루가 몇 날이고,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이어지길 바라. 과욕인가.

 

"아, 다 왔다."

 

밤길의 산책은 여기까지. 다시 만나 하루를 보낼 수 있게 어서 한 주가 지나가기를. 귀하게 여기는 만큼 우리의 작별인사가 아주 길게 이어지기를. 다만, 다시 만날 하루의 시간이 길면서도 또 짧아지기를.

 

오후 네 시에 네가 온다면 세 시부터 나는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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